갓바위
목포시 용해동(주민들은 성자동이라고 부른다.) 갓바위마을에 있는 갓바위는 사람이 갓을 쓰고 아름다운 영산강 끝자락을 굽어보고 있는 모습으로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성자동의 주봉도 갓바위의 이름을 따서 입암산이라 하는데 예부터 목포 사람들은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여 목포팔경의 하나로 손꼽았으며 명승 중의 명승으로 칭송하였다.바닷가에 서 있는 한 쌍의 갓바위는 해식작용과 풍화작용이 빚어낸 것으로 목포의 관광보물이다. 바다를 향하고 서 있는 이 바위는 큰 것은 8미터 가량, 작은 것은 6미터 가량으로 바위 표면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벌집 모양의 구멍들이 송송 박혀 있다. 물이 들어차면 바위 표면이 염분에 젖었다가 물이 빠지면 수분이 용해되어 실리카 성분이 암석 표면에 남아 침전되면서 이와 같은 표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2001년 10월 문화재청은 지질광물, 고생물 자료 등 자연문화재의 체계적인 보존관리를 위해 자연유산보존협회에 의뢰하여 전국의 ‘지질?광물문화재자원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조사대상에 목포 갓바위가 포함되었는데 조사 책임을 맡은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김수진 교수는 갓바위가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갓바위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바다에 나가서 음미해야만 진경을 볼 수 있어 아쉬움이 컸으나 2008년 4월 10일 갓바위에 보행교가 설치되어 이제 갓바위를 직접 조망할 수 있다.
전설
효자가 울다가 바위가 된 아버지 바위, 아들바위, 갓바위…
전설로는 큰 바위는 아버지바위 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 라 하며 둘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지만 역시 아들 바위의 삿갓이 보다 근사하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거점으로 개항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 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 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갓집을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 며 쫓아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난 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 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갓바위 풍경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예부터 말 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 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이 곳에 아버지바위와 아들바위가 솟아오르고, 아들은 죄진 몸이라 하늘을 대할 수 없어 삿갓을 쓰고 있었다. 이 삿갓은 넓이가 6 m가량이고 한쪽 깃이 2m가량이나 된다.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팠다는 바위의 윗부분은 바위가 널리 깔린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청년이 파헤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근에는 이 바위를 중바위라 부르는 이도 있다. 아라한과 부처님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날 때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을 놓고 간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지금 이곳은 이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개의 묘가 들어서 있다.
교통편
– 목포공항 :
· 공항버스 이용 MBC앞 하차후 7번 시내버스 이용
· 택시 이용시 25분 가량 소요
– 자가 :
· 목포역 → 남해개발산업도로 → 목포제일중학교 앞 → 갓바위 문화지구내
· 시외버스터미널 → 목포과학대학 → 제일중학교앞 → 갓바위 문화지구내
– 시내버스 :
· 목포역에서 1번 승차 → 목포MBC 앞에서 7번으로 갈아탐
·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6번, 14번 승차 → 용해동 금호아파트 앞에서 7번으로 갈아탐
– 택시 :
·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15분
· 목포역 에서 택시로 15분